가죽장이소개

<개인이력>
2001 중앙대학교- Web-Design과정 수료
2002 동아방송예술대학- 광고홍보과 졸
2006 호주 UTS 디플로마- Degree of Business & Commerce 졸
2018 이탈리아 가죽학교 Scuola del Cuoio - 가죽가방제작 정규과정 수료
2023 현 ‘마고델꾸오이오’공방운영 및 가죽공예가 활동

<자격 및 전시> 2016년   5월  대한공예협회 가죽공예 1급 자격
2016년 10월  대한공예협회 가죽공예 사범지도사 자격
2016년 11월  살림꽃전시회(남원 한생명)
2018년   6월  SDC Contest 2018 ‘Borsa del Mago’(Italy Firenze SDC) 
2018년   7월  이탈리아 가죽학교 ‘스쿠올라델꾸오이오’ 수료 2018년 10월  지리산수공예전 (남원 길섶갤러리)
2018년 12월  Artist Crew G.R.U. 2nd Exhibition ‘휴머니즘’(함양문화예술회관)
2018년 12월  지리산문화예술전시회 ‘어루만지다’(남원 실상사)
2019년   8월  Artist Crew G.R.U. 3rd Exhibition ‘아이다’(함양문화예술회관)
2021 대한민국 가죽공예대전 최우수상 수상
2021 전국춘향미술대전 공예부문 장려상 수상
외 다수 전시 참여

<기타경력>
2006~2010 ㈜엑스컴인터내셔널- 전시기획, 홍보 및 전시장운영
2010~2020 지리산작은마을- 마을운영단 활동
2016 한국목공교육협회- 목공지도사 2급자격
2017~2018 지리산 구절초축체 기획/운영
2017~2019 산내여성농업인센터 가죽공예강좌 운영
2020 함양용평도시재생센터 가죽공예강좌 운영 
2021 장수군청 가죽공예강좌 운영
2021~2022 남원평생교육원 가죽공예강좌 운영
2022 경남문화진흥원 거점구축문화예술교육 함양용추 아트밸리 가죽공예강좌 운영

학창시절...

대학교초년생 때 고등학교의 주입식 학습이 아닌 자율식 학습인 대학공부에 적응하지 못하고 학사경고를 받아온 그에게 그의 모친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군대에 입대해 정신을 차리고 돌아온 그에게 그의 어머니는 조용히 학사경고장을 보여주고 그를 조용히 타일렀다. 그는 부끄러운 본인의 모습에 후회했다고 모친에게 말하며 그자리에서 그 해에 장학금을 받아내겠다고 호언장담을 했고, 1학기가 지나고 어느 여름날 과수석장학금을 그의 어머니에게 안겨주었다고한다. 

"할 수 있는 것은 할 수 있다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다고 거짓 없이 똑부러지게 말하는 것이 저의 성격이죠. 또 한번 한다 한 건 꼭 해야해요. 하하" 해맑게 웃으며 말하는 지리산총각의 말이다.  

너란 사람 성격하곤...

그를 만나본 사람은 누구나 처음의 그를 보고는 그의 본 모습을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너무도 조용하고 말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어느 정도 지내 보면 그의 조용한 성격뒤에 환한 미소와 따뜻한 마음, 솔선수범하는 생활태도에 반하게 된다. 비록 사람들과 말로 친해지지는 못하지만 그는 행동으로 사람을 이끄는 묘한 매력이 있다. 

어떤 사안이 있을 때 일단 저질러 놓고 사태를 수습하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선지 그는 완전한 방법을 강구해 놓거나 가능성 여부를 판단하여 행동하는 편이다. 어떻게 보면 모험심이라곤 조금도 찾아 볼 수 없는 그는 위험한 지름길 보단 안전한 도로를 택하는 차분하고 이성적인 사람이다. 그가 비록 내성적이지만 환경이 주어지면 사교에 있어서도 적극적인 편이다. 타인에게 배려심이 많아 주로 주변사람들에게 도움을 많이 주고 주변의 사람들도 그런 그의 따뜻한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 그가 힘들 때 도움의 손길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는 때로는 한 가지 일에 너무 몰두하여 다른 일들을 간과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한가지 일에 너무 집중해 있으면 주위에 대해 무관심하다고 주위사람의 질책을 들을 때도 있어요. 하하" 멋적은 웃음을 지으며 그가 말합니다. 그러나 그의 그런 성격이 순간 집중력을 발휘하여 남들이 하지 못하는 창의적이고 이색적인 일들을 하게끔 만들어 준다. 또한 자신의 일에 대해 책임감이 강한 그는 주어진 일에 대해서는 책임의식을 가지고 전력을 다해 일을 해결한다.

그는 어려서 부터 호기심이 많은 편이었고, 독서를 좋아했다. "호기심은 저로 하여금 뭔가 만들거나 사색과 공상에 빠지게 만듭니다. 어린 시절에 시계, 밥솥까지 전부 뜯어 놓아서 꾸중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덕에 지금의 저는 웬만한 가전제품은 스스로 고칠 수 있게 되었고 가끔씩 생활 발명품을 하나씩 만들곤 합니다. 이런 연유로 가족들은 다들 저를 맥가이버라 부릅니다." 그가 직접 만든 소품을 몇가지 보여주며 말한다. 그는 그런 호기심에서 출발해 컴퓨터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덕에 지금은 컴퓨터에 관련해서는 남들 뒤지지 않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예능에도 끼를 타고났다. 고등학교 시절엔 합창부에서 악장을 맡아 축제와 합창경연대회에 출전하여 상을 받았으며 뮤지컬 가스펠의 주인공역활을 하기도 했고 대학교 때는 연극동아리 활동으로 개성강한 연극배우로 활약하기도 했다. 노래부르기를 좋아하는 그는 늘 입에 흥얼거림을 달고 산다. 물론 지인이 아니면 그런 모습은 보기가 좀 처럼 힘들다. 그는 개인 시집을 자작하여 소장할 정도로 시에도 능하고 그림그리기, 조각, 만들기 등 조형예술에도 관심이 많다. 

직업능력...

그의 직업적능력은 광고 홍보학과에 맞게 기획서작성과 프리젠테이션 분석이다. 그는 사무적 문서를 많이 접하여 서무업무에 조금 강한편이며 또한 호주 유학으로 영문 문서와 기획서, 프리젠테이션도 소화할 만큼 다재다능하다. 그는 젊은시절 슈퍼마켓 물류창고, 세일즈와 컴퓨터 조립 및 수리, 네트웍 설비. 인터넷 카페 카운터와 컴퓨터 관리, 고객관리, DM 발송, 잡지사 관리부, 어학원 서무업무 및 원생관리 보조 업무, 정원 인테리어, 그 외 각종 농장생활 등 다양한 직업 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여 간접적 사회경험을 하려 노력해왔다.

 미래인력은 정보통신에 뛰어나야 한다는 목표 하에 정보처리 기능사과정과 웹 디자인 과정을 공부하였고, 엑셀, 파워포인트, 워드 및 한글 등 서무 업무에 필요한 프로그램 지식 습득은 물론 홈페이지 제작을 배워 학과 홈페이지를 개설 했으며, 그 외 플래시, 포토샵, 일러스트 과정을 공부하며 웹관련 기술을 익혀왔다. 

귀농귀촌의 계기...

그러던 중 코엑스의 대표 전시기획사인 엑스컴에 입사하여 보석시계전시회, 내나라여행박람회, 대학입시박람회, 바이오코리아, 주민자치박람회, 대한토목학회학술대회, 국제안경광학전, 세계로봇전시회, KORMARINE, 기계공업전, 핵의학컨퍼런스, 치의학컨퍼런스, 수면과학컨퍼런스 등 국내외 유명 전시와 컨퍼런스를 일터로 종횡무진하였다. 

입사시 그의 입사합격을 좌우 했던건 업무능역도 외국어 능력도 아닌 그의 진솔함이고 당당함이었다. 그는 떡하니 학사경고를 받아 학교생활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자기소개서에 써 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사대표는 이 소개서를 읽자마자 사람이 되었다며 이 사람을 채용하라고 인사담당자에게 전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그가 퇴사하고 나서야 인사담당자로 부터 전해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2년, 가는 곳이라고는 오직 집과 회사뿐. 주말도 없이 밤,낮없이 미친듯이 일하다가 문득 이렇게 사는 것이 좋은가 부터 시작해 그의 심경에 변화가 왔다. "회사와 직장동료들 직업적 성취감은 최고였습니다. 다만, 매일 채바퀴 처럼 도느 삶에 회의를 느꼈어요. 전시기획사이면서 디자인회사인 직장의 일과가 고된 밤샘 제안서작업에서 부터 전시참가업체상담과 전시건축물의 도면과 치수, 건축자재의 발주 등 과도한 스트레스가 동반된 업무를 주로 하다보니 일에 치이기 시작하고 고객의 클레임에 치이기도 하고 ... 뭐 그런 일상이 지겨워 졌고, 인생무상함도 느끼고 자연으로 돌아가 살고픈 생각도 들고 복잡한 심정이었죠." 그가 얼마 지나지 않은 지난 생활을 회상하며 말을 꺼냈다.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지금 우리의 힘든 직장생활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를 시골로 이끈 지리산...

그럼 무엇이 그를 이곳 지리산으로 이끌었을까? "나를 이끈건 지리산이겠지요. 엄밀히 말하자면 지리산의 자연과 정겨운 시골의 풍경, 활기찬 지역민의 활동들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충분히 귀농,귀촌하여 살 수있겠다는 희망을 저에게 주었지요. 처음에는 귀농,귀촌한다는 생각에 즐거워 했지만 막상 갈 지역을 고르느라 양평, 청도, 상주 등의 지역을 돌아다닐 때는 고령화된 농촌을 보며 앞이 깝깝했어요. 그런 저에게 산내라는 젊은 농촌은 밝은 희망의 불이었죠." 그가 사뭇 진지하게 귀농,귀촌의 과정을 설명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귀농,귀촌에 고려되는 부분이란 이렇단다.

1. 지역에서 경제활동이 가능할것(민박, 체험관광, 과수 및 농사가능, 교통이 편리하여 관광갱의 이동이 있는곳 - 이유인 즉 최소한의 농사를 못지는 상황이 되어도 다른 경제활동으로 대체할 수 있어야 실패하지 않음.)

2. 지역에서 혹은 인근에서 문화생활이 가능해야함(각종 동호회 모임에서 부터 음악회, 영화, 연극/뮤지컬 등의 공연 등- 문화생활이 안되면 다시 서울생활이 그리워지므로 정착실패할 확률이 커짐.)

3. 지역민과의 소통과 모임이 활발한 곳- 시골은 혼자서 못사니까 서로 기대고 의지할 그리고 가장 중요한 대화가 통하는 자신또래의 이웃이 충분히 있어야함.

4. 집을 짓고 살수 잇는 터전이 있는 곳- 내집 마련이 아니면 시골에서 살 생각 말아야죠.


그가 다시 말을 꺼냅니다. "그 무엇보다 가장 큰 계기는 어머니의 선견지명과 결단, 전폭적인 지원과 격려죠. 시골내려온다고 반대할 여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머니도 적극 지원해주시니 무슨 걱정이 있었겠어요? 하하핫! 회사일에 치여 너무도 힘들게 지내던 중 어머니께서 앞으로는 귀농하여 농촌에서 흙과 사람과 소통하며 사는 것이 중요시 된다고 귀농을 얘기하셨죠. 그때는 몰랐는데 막연히 귀농생활에 동경이 생기기 시작하더라구요. 망설이던 저를 어머니는 억지로 끌고 다니면서 이곳 저곳 보여주시더군요. 그러던 중 산내라는 곳에 왔는데 어머니도 저도 이곳의 아름다움에 반해 버렸죠. 물론, 경제활동이 가능하고 이웃간의 소통이 활발한 조건도 만족했기에 이곳 산내를 정착지로 선택했지요."

귀촌 후...

그가 이곳에 집을 짓고 정착한지도 3년이 되어간다. 그 시간동안 그도 그자신이 산내에 적응하고 살아가기 위해 몸부치며 자기자신과 싸웠다고한다. "우선 컴퓨터와 자동차에 친하던 몸을 흙과 발로 걷는 생활에 단련시키는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그리고 산내에 정착한 귀농자들과 원주민과의 관계형성에 많은 시간을 보냈죠. 그덕에 지금은 많은 분들에게 제 능력으로 힘이되어 드리고 저도 많은 도움을 받고 있지요. 젊은 인재가 필요한 곳이라 팔 걷어 부치고 다니면 먹고사는데 지장은 없을 것 같아요. 하하핫! 모두들 저를 참 많이 좋아해 주시고 친동생, 아들처럼 잘 대해주시니까 전 이곳 생활이 너무 즐겁습니다."  

이곳 분들이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도 솔선수범하는 그의 생활태도와 경제적 이익보다 사람의 관계와 사람의 도리를 중히 여기는 그의 정신을 높이 사기 때문이리라 여겨진다. 그는 그가 가진 능력이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하며 말한다. "제게 주어진 능력은 남다른 사고, 어떤 일이나 물건을 보면 그것에 대해 충분히 검토하고 분석하여 좀 더 발전된 것으로 변화시키는 능력과 주어진 재료 안에서 필요한 것을 만들어 내는 창조력입니다. 그런데 그런 능력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거 아닌가요? 그보다 전 사람의 마을을 읽고 동감해주고 사람을 위하는 제 가치관이 대수롭지 않은 저의 능력과 더해져 다른 사람의 능력 보다 더 돋보이게 해준다고 생각합니다. 하하하!"  

외부에서 보는 그는 귀농인이 아니라 농촌에서 사는 사람이다. 그가 귀촌을 했지만 아직 농사를 짓지 않고 경제적 벌이가 아직까진 수월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한다. "네, 맞아요. 전 농사도 짓지않고 아직 공방운영이 미비하고 마을과 지역에서 약간의 일을 하고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산내에 남 부럽지 않은 집이 있고, 적지않은 퇴직자금도 가지고 있고, 업무적 능력도 있고, 건강한 신체, 건강한 정신이 있습니다. 또, 나를 사랑하고 믿어주고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는 가족이 있습니다. 서울에서 퇴사일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스트레스 받으며 건강을 해치며 월급쟁이로 사는 것 보다는 안정적인 시작아닌가요? 하하하!" 그의 자신감 넘치는 말투에 그의 신념이 보인다.